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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요재공>영도재중건기(永陶齋重建記)휘찬(諱纘)
永陶齋重建記 山陽北十里許 甘井洞 碧玉山一支東南向走峙下一洞之名而山勢奇勝而盤屈繚曲 程川注之 風光明媚洵 可稱名區而最中一崗向癸之原 惟我入寶城先祖陶庵公谷城縣監諱續及其 季子顯陵參奉諱由信孫海南縣監諱之漢三世考妣次第繼葬 而又玄孫桃源道察訪諱廷顯祔葬于右局 凡十位也世稱吉崗焉墓下齋永陶 永陶 盖爲享祀不忒追孝前人 永世不忘陶庵諸 先祖之義也 公以麗朝完臣樂齋公之玄孫 玄洲公諱彭孫 第三子早登朝著 見時不淑 急流勇退 浩然南爲 其意安在 盖歷世宦海波浪 諳練世故 父子相繼 先後辭官而賦歸 來自淳昌而南原而寶城 以寓退溪 退陶晚 隱之意 而自號陶庵 植子姓於樂地 百世遺安 使吾子孫 飯稻羹魚 一夕安寝 未甞非先祖垂裕之苦心先祖之爲子孫謨 可爲至矣吾子孫 永久思慕 豈可與諸宗同日而語哉 同其所同而獨吾所獨則百世勿替 而永陶是不爲虛顔矣 有齋己古 年久而圮中經大火往庚戌叔父重庵公與伯公兄第商確倡於宗而重建道路改觀 先徽益彰 凡爲后孫 勿以堂搆於外者 爲吾事己了 而以堂搆於内者 益致意焉則 永陶之實 在此而不在彼矣 後五十九年戊申秋 陶庵公十五世孫 平奎 謹識 영도재중건기(永陶齋重建記) 산양 북십리허에 감정동은 벽옥산 한 줄기가 동남으로 뻗쳐 나니 밑에 한동명이다. 산새가 기승하고 꾸불꾸불 두루 엉켜 정자천이 흐르고 풍경이 아름다우니 가히 명구라 칭하고 한 가운데등에 계좌원 묘는 우리 입보성성선조 도암공(陶庵公) 곡성현감 휘 찬(纘)과 그 계자 현릉참봉 휘 유신(由信)과 손자 해남현감 휘 지한(之漢) 三代 고비 위를 세장하였고 또 현손 도원도찰방 휘 정현(廷顯)은 그 우국에 안장하였으니 세상에서 명당이라 칭하다 묘하 제각은 영도(永陶)니 영도는 대개 향사에 어긋나지 않고 전인의 효를 추모하여 영세토록 도암제선조(陶庵諸先祖)를 잊지 않는다는 의를 위함이라 공은 고려조 충신 요재공(樂齋公)의 현손 현주공(玄洲公) 휘팽손(諱彭孫)의 제三子이신대 일찍 벼슬길에 올랐으나 시대의 혼탁함을 보고 급히 용퇴하야 호연이 남아 하였으니 그 뜻이 어디 있는가 대개 세상살이가 벼슬길에 파란이 있는지라 세고를 알아차리고 부자가 서로 계속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와서 순창으로부터 남원으로 보성에 당도하여서 이퇴계 선생(李退溪先生) 퇴도만은(退陶晚隱)의 뜻을 붙여 자호를 도암(陶庵)이라 하고 자손을 락지에 안착시키고 백세에 안락을 끼쳤으니 우리 자손으로 하여금 쌀밥과 고기국 먹고 한 밤이라도 편히 쉬게 한 것이 선조의 후덕과 고심이 아니라 선조의 자손 위하여 생각한 것이 가히 지극하다 할지로다. 우리 자손이 영구히 사모하여 어찌 가히 저종과 더불어 날을 같이하여 말하지 않으리요. 그같이 할 바를 같이하고 나의 고독한 바를 홀로 한즉 백대라도 가름치 말 것이요. 영도(永陶)는 이(虛顔) 허안(비낫)이 되지 않으리라 제각이 있으나 연구하여 퇴락되고 또 중간에 큰 화재를 입어 지난 경술년에 숙부중암(重庵)공이 백공 형제와 상의하고 종중에 건의하여 중건하였으니 도로 개관함에 먼저 빛나던 것이 더욱 들 처난지라 대범 후손 된 자 외부의 집을 지은 자는 나 할 일을 이미 다했다고 하지 말고 안으로 실상이 있게 지은 자는 더욱 뜻을 이루는 것인즉 영도(永陶)의 실상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으리라. 후五十九年무신추 도암공십오세손 평규 근지(陶庵公十五世孫平奎謹識) 追記 右記文 永陶齋初建後記文也 厥後歲久 齋舍頹圮 以癸丑春 詢謀僉同 破舊屋而以新材 重建于舊址 以備丙舍之醴制 不亦善乎 謀所以新之者 元老平基氏也 協贊者則泰 翼禧成啓栢台勲 東旭良勲 拮据鳩財而成也 役既始以匠人之不察 工事中斷 以台勲董役選拔 一切着任 歸于台勲 台勲 居彌坊石虎 相距二十餘里 自春至冬 朝夕往來 每日出勤董督而功吿訖 以是齋之成畧 記顚末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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